트위터에서 뜬금없이 풀었던 유곽물 토마나라입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 썰...같지 않아졌지만
고증도 하나도 하지 않고 트위터에서 140자에 맞춰 되는대로 망상했기 때문에 썰로 분류합니다.
기본 설정은
나라사카 - 유곽의 호위무사 (공손히 얌전히 손님맞는 게 상상이 안되기 때문에..)
토마 - 방계 왕족 (언제나 특별한 넘버원이니까..)
그런 클리셰 덩어리입니다만 괜찮으신 분만 더보기 클릭해주세요.
말이 좋아 호위무사지 사실 기녀가 도망가면 잡아오고 그런 건데 나라사카는 집단의 막내같은 입장으로 솔직한 입장을 대라면 자기도 이런 일 하기 싫다. 그러나 쌍둥이인 나스와 이곳에 팔려온 후로 남자는 필요없는 유곽에서 이렇게 자라왔다. 남자인 나라사카와는 달리, 나스는 어여쁜 외모로 인기를 끌 것이라고 일찍이 포주의 사랑을 받았으나 머리를 올리기도 전 중병에 걸렸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몇 개월 전 듣고 그 후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나스를 보호하기 위해 나라사카는 계속 이곳에 있다.
하루하루 병색이 뚜렷해지는 누이를 위해 문가를 지키고 서 있다 뜰에 핀 꽃도 꺾어다 주고 다른 유녀들이 먹던 과자도 갖다 주고… 어느 날 보라색 제비꽃을 가져다주자 꽃을 보며 기뻐해주었다. 토마가 처음 이곳에 들른 것은 그날이었다.
친구들에 이끌려 온 유곽을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친구들은 그 전부터 기대주였다던 아이, 아직 머리 올리기 전이냐며 그 아이로 대접하라고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포주는 방계 왕족씩이나 되는 귀한 손님을 놓치기 싫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가볍게 주위나 둘러보던 토마는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구석방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라색 꽃을 보고 웃는 여자애 얼굴이 기녀같지 않게 말갛다고 생각했다. 그 앞에 서 있는 누군가는 뒤를 돌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시끄러운 친구들 앞에서 포주는 난처한 듯 웃음만 지었다. 병에 걸려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될 걸 알았으면 곧 머리올린다고 광고도 하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던 포주 눈에 구석방 앞에 서 있는 똑같은 갈색 머리통이 보였다. 재빠르게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모래를 밟아 대뜸 손을 낚아채고, "그 아이는 못쓰게 되었지만 이 아이는 어떠신지요?" 하며 나라사카를 잡아 끈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아양을 떠는 꼴이 우습기도 전에, 이게 무슨 일인가 나라사카는 어안이 벙벙. '못 쓰게 되었지만' 이라는 표현에 평소라면 화를 냈을텐데. 꾹 붙들린 손목이 아프다.
남자잖아? 친구들이 시끄럽다. 토마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간다.
"예, 예, 남자지만 이 아이도 여기서 자라온 아이입니다 기본적인 건 다 알고 있어요. 아니, 외려 이렇게 특별한 분께 딱 맞을만큼 특별한 상대 아닐지, 저희가 다 알아서 할테니-"
얄쌍한 입술이 쉴새없이 나불대며 아첨하기 바쁘다. 이곳에 온 뒤로 이런 칭찬(인가…)을 받아본 적이 없다. 피부가 곱다느니 얼굴이 반반하다느니 쓸 수 있는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나라사카를 꾸미는 포주를 낯설게 보는 나라사카, 그리고 그런 나라사카를 가만히 보는 토마. 옷을 지금 이렇게 입어서 그렇지 꾸미면 제법… 포주의 말허리를 토마의 가벼운 목소리가 뚝 자른다.
"그럼 꾸며와 봐."
"예, 예…?"
"어차피 계속 마시고 있을거니까 천천히 공들여서 해 봐."
더운물에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짧은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단정히 빗고 살결 위에 향유를 붓고 입술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지고― 이 모든 과정을 당연히 겪어본 적도 겪으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다. 도망치고 싶다. 시중드는 아이들 따위 간단히 제압해 바로 벽을 뛰어넘어 도망갈 수 있다. 꽃을 보고 웃던 나스만 아니면. 옆에서 안쪽 방 기녀가 코웃음을 치며 조언 아닌 조언을 해준다.
"남자인데다 처음이잖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가만히나 있어."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기녀가 하, 하고 웃고 "네가 그분 걸 세울거야 어쩔거야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하고 대꾸한다. 그래도 뭔가 맘에 들었는지 넣을 땐 이걸 바르라며 병도 하나 던져주었다. '넣을 땐'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도는 나라사카도 안다. 수치심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래도 도망가버릴 수는 없었다. 나라사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 어쨌든 클리셰답게 (그리고 원래 나라사카는 예쁘니까) 꾸며놓으니 더 예뻤다고 한다. 나라사카가 몸을 치장하는 동안 하늘은 어두워졌고, 토마와 같이 온 무리도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갔다. 홀짝, 고즈넉한 촛불 색이 꽤 좋다 생각하며 토마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아까 봤던 여자애와 닮았지만 이쪽이 훨씬 차갑고 날카롭다. 마당이나 지키고 서 있을 때도 반반했던 얼굴에 유곽의 손길이 더해져 여태까지 봐온 어느 미인 못지 않다. 차분하게 내려진 갈색 머리카락이 숙인 고개를 따라 흘러내렸다.
"오늘 모시게 되었습니다."
긴장한 듯 어색한 듯 딱딱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토마가 손짓했다. "가까이 와서 일단 술이나 마시자. 술 따를 줄 알아?" 나라사카가 끄덕였다. "그 정도는…." 술을 따르는 손이 기방 잡일하던 손 치고는 제법 하얗지만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혀 있다. 창이나 활 같은 걸 배운 적이 있을까, 생각하면 그런 남자애가 이렇게 옷을 입고 이 앞에 앉아있는 것이 어쩐지 괜히 기분좋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고. 어쨌든 얌전히 있는 걸로 보아 조금은 본인 동의 하에 왔다는 거 아닐까 하고 슬금 다시 얼굴을 본다. 보통 기녀 같으면 샐샐거리며 아양을 떨어줬을 텐데 그런것도 없이 무뚝뚝하게 숙인 얼굴. 그래도 묘하게 예뻐보이는 얼굴. 촛불 탓인가…
이렇게 방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지? 물으니 고개를 끄덕. 매번 밖에 있었지? 끄덕. 웃음이 나온다. 대접하는 주제에 어디서 고개나 주억거리고 있는 거냐고 혼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포주가 말한 '알 거 다 안다'는 무슨 뜻인지. 일단 기본적인 기녀의 자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고 판단하고,토마는 물었다.
"이름은 뭐야?"
"나라사카 토오루입니다."
"그거 너무 이름이잖아, 기명은?"
"저는 기녀가 아닙니다. "
흐음… 토마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데 내 앞에서는 기녀로군."
그 말에 나라사카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기녀가 하는 몸단장을 하고 품에는 뭔지 모를 병까지 하나 받아들고 술이나 따르면서 기녀가 아니라는 것도 우습다. 나라사카는 고개를 들었다. 좋으실 대로 부르시죠. 좋을 대로 부르라며 좋을 대로 굽혀지지 않는 눈을 한 상대에 토마는 웃음이 나왔다.
"이봐, 좋을 대로 부르는 게 문제가 아냐."
"나는 여기서 너를 좋을 대로 해도 돼… 얼마든지." 속삭이며 반쯤 빈 술잔을 옆으로 치웠다. 이 정도는 알겠지, 무슨 뜻인지. 토마의 예상이 맞다는 걸 경직된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겹겹이 두른 화려한 옷감 아래 근육이 긴장한 것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반항은 않는다. '알 건 다 알아요' 라고 했던 포주의 그 말은, 이제부터 확인하면 된다.
-
"아팠어?"
"안 아팠어."
"거짓말."
이쪽을 보지 않는 나스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다. 화가 나서 이쪽을 보지 않는건지 부은 눈을 보여주기 싫어 그런지 둘 다인지. 나라사카는 다시 말했다. "안 아팠어." 거짓말을 할 때 주먹을 꾹 쥐는 습관은 여태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며 나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차라리 둘 다 사내아이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나라사카가 맥없는 상상을 단칼에 끊었다. 단호한 목소리와 다르게 오늘 아침 이슬에 핀 꽃을 건네주는 손길은 더없이 자상하다.
"그럼 꽃이 어울리는 사람이 없잖아."
나스가 기어코 작은 바람소리를 내며 웃었다. 옛날부터 토오루는 자기 생각은 않지, 너도 어울린다는 것은 죽어도 모르지… 계속 옆에서 여러가지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도 모르고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야속한 기침 뿐이다. 황급히 물을 가지러 자리를 뜨는 뒷모습을 보며 나스는 나라사카가 자유로워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도망치는 기녀를 뒤쫓는 대신 좋아하는 활을 맘껏 쏠 수 있길, 밤에는 유곽 문 앞을 지키는 것 말고 좋아하는 서책을 읽을 수 있길, 목숨으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줄텐데.
변덕스러운 나으리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놀란 표정을 한껏 반가운 표정으로 가장하며 포주는 고개를 조아렸다. 또 찾아주셔서 이 적적하고 허름한 곳이 더할 나위- 말을 싹둑 자르고 토마가 씨익 웃었다. "그 애 있어? 나 받을 게 있는데."
그 날 나라사카는 캐묻는 포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묵묵히 옷을 챙겨입고 간간히 얼굴을 찡그리며 평소대로 잡일을 했다. 목석같은 놈이 뭔 일이라도 있었을라구, 저래도 예의는 아는 놈이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나? 받을 것?
"천천히 해서 들여보내."
한가로운 말투에 담긴 뜻을 홍등가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유곽 뒤에서 불 지피는 것을 돕고 있던 나라사카는 거의 끌려오듯 마당에 섰다. '큰방 어머니'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고 있다.
"급하니 일단은 넘어가마, 준비하면서 저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히 고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과 똑같은 수순으로 더운물에 몸이 씻겨지고 향이 나는 기름이 발리고 불편한 옷이 입혀진다. 무엇을 드리기로 했냐니까?! 불호령같은 목소리가 공기를 때렸다. 그렇지만 되짚어 생각해봐도 도통… 그날은 아팠고, 아팠고- 그 외의 기억이라 하면.
아, 한참 만에 열린 입술에 잠시 머리를 빗기던 시동의 손길이 멈칫했다. 부리부리한 포주의 눈이 나라사카의 말에 순간 둥그래졌다.
"…웃음을?"
「한 번도 안 웃네, 웃음을 파는 거 아닌가?」
「'저는 팔지 않습니다.」
「지금 팔고 있잖아?」
그 말에 아무 대답이 없는 나라사카의 뺨을 쓰다듬으며 토마가 중얼거렸다. 보통은 말야, 내가 오면 다들 좋아한다고. 넌 찡그리기만 하네.
「…아프니까…」
「뭐?」
「좋아야 좋아하지요.」
그 말에 토마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내가 오는 거 자체가 좋은 일이라니까? 이런 데서는.」
「큰방 어머니는 좋아하실 겁니다.」
「너는?」
토마가 몸을 일으켜 바닥을 짚었다.양 팔 사이에 나라사카를 가두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지금 배워 둬. 내가 오는 건 좋은 거야.」 똑바로 마주쳐오는 녹색 눈동자 안에 웃고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니까 다음 번에는…」
그때는 어린애 고집처럼 느껴져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그게 다인데. 그 얘기를 듣고 황당한 것은 큰방어머니도 마찬가지라, 끄응 소리를 내며 됐다, 됐어 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다만 한 치 실수없이 모시라는 당부는 잊지 않고.
유곽 잡일이나 하는 사내애 웃음 보러 여기까지 오다니 왕족이라지만 방계는 참으로 할 일도 없나 보구나. 방을 들어서며 한 생각은 그게 다였다. 아양떠는 얼굴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잘나가는 기녀들을 붙여 줄 텐데. 나라사카가 있는 유곽도 결코 작은 곳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왕족이 친구들과 들를 정도는 되는 규모이니 소문이 자자한, 예약만 달포를 기다려야 한다는 기녀도 있다. 큰방 어머니가 얼마든지 불러 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웃으며 방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오늘도 안 웃네? 저번에 약속했잖아?"
일부러 실망한 티를 팍팍 내도 꿈쩍도 안 하는 것이 저쪽도 여간 고집이 아니다. 순수하게 궁금했다. 왜냐면 여자 쪽의 말간 미소를 봤으니까, 그럼 이쪽은 어떨까 하고. 호기심이 이는 걸 참고, 이녀석 그때 아파했으니까 좀 나으라고 일부러 며칠씩 있다 와 줬건만… 사람 배려를 귓등으로도 눈치채 주지 않는 것 같다. 좀 억울하고 약이 오르기도 하고 오기가 생기기도 해서, 토마는 술을 따르는 손을 낚아챘다.
"있잖아, 그 여자애는 누구야?"
"어떤…."
"그, 단발머리에, 구석진 방에 있던―"
"아…… 쌍둥이 누이입니다."
"아, 그래서 닮았구나."
그리고 또 정적. 토마가 말하지 않으면 나라사카는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그걸 눈치채고 나자 오기가 났다. 그렇다면 실컷 말하게 해주마.
"그럼 그 누이 이야기나 해 줘, 오늘은."
"레이… 얘기를?"
"네가 재미없게 구니까 별로 할 맘도 안 생기잖아."
퉁명스레 받아치는 토마 앞에서, 할 맘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에 나라사카는 사실 조금 안도했다.
"레이 얘기도 별로 재미 없는데요."
"아,됐으니까."
기어코 실랑이를 벌이고서야 나라사카는 조금씩 이야기를 한다. 이곳에 오기 전 둘이 함께 마을을 뛰어다녔던 얘기, 같이 무서운 동화를 듣고 손을 잡고 자던 얘기, 산에서 놀다 길을 잃은 얘기… 토마는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들었다. 나라사카의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레이의 치마가 흙탕물 범벅이 됐었다는 말을 하며 아주 조금, 나라사카의 입술이 호를 그었다. 토마가 살면서 본 미소 중 가장 희미하고 엷었다. 옅게 떠올랐던 미소가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 토마가 나라사카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나, 할 마음이 생겼는데.
-
…이상하단 말이야. 토마는 감고있던 눈을 떴다. 걔는 분명히 애교도 없고 착 달라붙어오지도 않고 좋다고 소리를 내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날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라사카만 생각하면 아쉬운 기분이 든다. 뭐가 아쉽냐하면 순간 떠올랐다 없어져버린 미소가 아쉽고 붙잡아오지 않는 손이 아쉽고 시간이 금방 가버리는 것 같아 아쉽고 하다못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으면 짧아서 금세 손끝에서 사락 빠져나가 버리는 것도 아쉽다. ……오늘 한 번만 더 보고 올까.
-
평생을 이 바닥에 몸담아온 눈으로 유곽의 큰방 주인은 나라사카를 아래위로 훑었다. 문이나 지키고 서있게 하거나 잡일이나 시켰건만, 제법이란 말야. 토마가 왕왕 이곳을 찾는다는 소문은 골목 구석 언저리까지 퍼진 지 오래다. 아무래도 제대로 교육을 시켜놓는 게 나을지도…. 그 어린 왕족, 지금이야 푹 빠져있다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성정이라니 언제 발길을 뚝 끊을지 모른다. 포주는 셈이 빨랐다. 일단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겠다. 시동을 불러 소문을 내도록 시켰다. 왕자님이 뻔질나게 찾으시는 그 남자애, 곧 정식으로 머리를 올린답디다! 입에서 입을 타고 시장 안쪽까지 발 없는 말이 내달렸다.
-
나스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베개 한쪽에 묻은 핏자국이 내내 맘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약은 꼬박꼬박 먹이고 있는데… 혹시 양을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큰방에 들어가는 것은 늘 달갑지 않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나라사카는 결국 문 밖에서 기척을 냈다. "들어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 지금 먹고 있는 것도 얼마가 드는 줄 알아? 내가 너희 둘을 입히고 키웠으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 주는 거지! 어차피 죽을 날 받아놓고 사는 목숨!"
으득 이를 깨무는 나라사카에게 큰방 주인은 아기 어르듯 말한다. 눈을 부라리다가도 금세 입 안의 혀처럼 살살대는 것은 그녀를 여태껏 이 홍등가에서 살아남게 한 일등공신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태도를 바꾸어 준다. 지금 나라사카를 꾈 때처럼.
"아니면, 네가 좀더 돈을 버는 것은 어떠냐? 못할 일도 아니지 않니, 이미 몇 번이나 받아보았지…? 그 돈이면 약이 무어냐, 의사선생도 두어 번은 오게할 수 있다… 해 보니 별거 아니지 않던?"
나라사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받아보았다. 아프기만 했던 것이 이제는 손길이 다정하다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급하게 옷을 벗기는 손을 도우려 먼저 몸을 뒤틀기도 했다. 데운 물을 가득 담은 욕조로 데려갈 때면 아, 오늘 오시는구나 싶었다. 화려한 수가 놓인 비단옷을 겹겹이 입고 얼굴에 분칠을 하는 것도 그러려니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히죽 웃는 큰방주인의 얼굴을 보며 나라사카는 밀려오는 구토감을 눌러 참았다. 포주를 향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토할 것 같았다. 이런 데에 익숙해져서 뭘 어쩌겠다고, 이래도 기녀가 아니라고, 웃음은 안 판다고… 팔고 있잖아? 라고 했던 토마의 목소리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웅웅 울렸다. 얼마나 바보 천치같았을까. 힘을 잔뜩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라사카는 단칼에 거절하고 방을 나왔다. 얼굴을 더 마주대고 있으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그 날 처음으로 나라사카는 치장을 하지 않겠다 했다. 더운 물에도 들어가지 않고 향유를 붓지도 않겠다 했다. 옷을 입히려 다가오는 시동을 떠밀었다. 도망가는 기녀를 잡으러 갈 때 선두에 섰던 형님께, 처음으로 도망치는 기녀 입장이 되어 얻어맞은 것도 그 날이었다. 몸에 멍이 들 테니 제대로 맞지는 않았지만 팔이 뒤로 포박된 채로는 더이상 옷감을 구겨버릴 수 없었다. 욕조를 있는 힘껏 발로 차자 발까지 묶어버리겠다는 으름장이 돌아왔다. 밖에서 토마에게 아양을 떨며 술상을 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토할 것 같았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면 몇 번을 꾸며 입어도 어색한 발놀림으로 나라사카가 들어온다. 그 걸음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문가에서 침상까지의 거리도 토마에게는 아쉬웠다. 좀 더 길었으면, 아냐, 좀 더 짧았으면.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성큼성큼. 그 날 나라사카에게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이 따위 옷- 문을 열어주던 시동이 놀란 표정을 지을 만큼, 옷의 불편한 부분을 차라리 위로 걷어올려버리고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로 나라사카는 똑바로 걸어들어왔다.
침을 꿀꺽 삼키는 토마 앞에서 나라사카는 허리를 곧게 펴고 꿇어앉아 팔을 들었다. 평소처럼 술병을 들려 함이 아니었다. 소매의 고운 천이 나라사카의 얼굴에 거칠게 비벼졌다. 옅게 칠해놓았던 분이 엉망이 되고 입술의 붉은 것도 턱까지 번졌다. 차분히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나라사카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편 채로 토마의 눈 앞에 들이밀었다.
"봐, 내 손이야. 손가락 사이에 굳은살이 배겼어."
나라사카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토마를 마주보았다.
"나는, 기녀가, 아니야."
어느샌가 마음대로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토마는 잠자코 나라사카가 좋을 대로 하도록 놔두었다.
"토마 상, 봐, 화장따위 지우니 그냥 남자애지. 그런 거야. 나는 무엇도 팔지 않아. 앞으로는 토마 상에게도 팔지 않아. …그러니 이제 오지 마."
"너 말야…… 내 이름 네가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어?"
나라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이 생각나 토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수 없다는 것도? 또 끄덕. 이제 내가 오는 게 싫어? 다시 한 번 끄덕. 토마는 팔을 뻗어 나라사카를 끌어안았다. 품에 가득 차는 이 몸은 다른 여자들처럼 부드럽지도 낭창하지도 않다. 딱딱한 어깨뼈나 마른 날갯죽지. 하지만 토마는 그런 게 아쉽고 좋았다. 끌어안아 가까워진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인다. 있잖아, 그렇게 이상하게 분칠을 지워도 예쁜 것도 알고 있어? 끌어안은 몸에 순간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라사카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 날 토마는 한참을 그렇게 나라사카를 안고만 있었다.
-
나스의 병색이 깊어질수록 포주는 더 노골적이 되었다. 한번은 선심쓰듯 무슨 환이라며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을 두어 개 던져주었다. 그것을 먹고 나스가 반짝 안색이 좋아져 한달음에 큰방으로 달려가자 기다렸다는 듯 거래를 걸어 왔다. 그 환은 말이지, 저기 성에서 의원으로 계시다가 나이들어 나온 건넛마을 명의가 지은 거란다. 보았다시피 효과는 좋은데, 가격이 말이다… 사정사정해서 싸게 얻어오는데도 한계가 있지 않겠니, 응, 토오루. 너만 마음을 고쳐먹으면- 그날 이후로 토마의 발길이 뚝 끊겨 조급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일언지하에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정말로 잠깐이나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던 나스를 생각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벌써 시장 밖에는 머리를 올린다느니 이상한 소문이 나돈다 들었다. 나라사카는 일단 하나만 더 환을 구해달라 요청했다. 한 알만 더 구하면 그것을 가지고 시장 안쪽 약방 노인에게 갈 요량이었다. 노인은 인심이 후한데다 이런 시장에서 약방을 하고 있지만 나름 오래 약을 지었다 들었다. 환을 가져가 비슷하게라도 몇 알만 만들어달라하고, 사정사정해 한 번만 나스를 보러 와 달라 부탁하면, 어쩌면…….
환을 먹고 잠깐 상태가 좋아졌던 나스는 반대급부인지 급격히 다시 몸이 안좋아졌다. 전보다 기침이 심해진 것도 같았다. 며칠째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던 나스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은 노인이 와 주기로 한 전날이었다.
-
쓰지 않는 창고에 갇혀 나라사카는 갈라진 나무 틈 사이로 햇빛이 들 때면 낮, 달빛이 들 때면 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근육이 아직 욱씬거리는 곳이 있었지만 피멍이 들었던 곳은 조금씩 푸른색 또는 갈색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얻어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도망치는 기녀를 잡아올 때도 물 한모금 주지 않고 굶길지언정 마구잡이로 때리지는 않는다. 기녀는 몸이 재산이니까. 하지만 나라사카는 호위무사였고, 남자였고, 당장 손님을 받을 것도 아니었다.
나스의 상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것을 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기방 한구석에서 앓다 죽어간, 머리를 올리지도 못했던 소녀를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산 어스륵에 무덤을 만들고 무릎을 꿇어 나라사카는 흙무더기를 가만히 껴안았다. 짬이 날 때면 어김없이 차가운 흙무덤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 되지 않았던 날, 유곽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라사카도 소문을 들었다. 「그, 토마 님이 빠져계시다는 남자애, 보름 후면 손님 맞는다는데?」 「그래봤자 귀족놀음이잖아.」 아연실색해 뛰어들어간 큰방에서 큰방주인은 차갑게 나라사카를 맞았다. 독사같은 눈이 또 나라사카를 아래위로 훑었다.
「당연하지, 그동안 다 장난으로 들렸든?」
콧방귀를 뀌며 포주는 다시 담뱃대를 들었다.
「토오루, 어머니는 셈이 정확하단다.」
건초더미에 몸을 대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래된 창고 안에서는 들풀과 거름 냄새가 섞여 난다. 그 날로 담을 넘어 도망쳐 달려가던 골목길에서 등허리를 가격당해 쓰러진 것이 나흘 전. 실컷 얻어맞고 창고에 갇힌 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완전히 도망나간 기녀 취급이다. 그런가, 이제 대놓고 기녀라 이건가. 기운이 없어 맥없이 눈만 깜빡였다. 나무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스름한 것을 보니 동이 트는 모양이다. 끼긱, 공기를 찢는 듯한 듣기싫은 소리를 내며 낡은 창고 문이 열렸다.
마당 한구석에 꿇어 앉혀놓고 한 통 가득 들어찬 물을 수직으로 내려붓는다. 촤악, 쏟아진 물이 멍든 피부를 때리고 마당의 흙을 슬금슬금 물들여간다. 크,크흡, 토해져나오는 기침을 하느라 바쁜 가슴팍을 나무 지팡이가 푹, 사정없이 찔렀다. 좀, 빚을 갚을 마음이 들던, 토오루? 대답이 없자 여인의 잇새로 쯧, 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한번 더 물이 들이부어졌다. 귀, 코, 콧구멍과 입 안쪽까지 사정없이 물이 흘러내렸다.
"토오루."
"……."
큰방주인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
'요즘은 통 안 가시네?' 밖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리를 토마는 애써 모른척했다. 어떻게든 참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가네 안 가네 시끄럽네들… 눈을 감고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잘됐지, 거기 얼마 전에 상도 치렀다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나 됐다고 그 소리에 도로 눈이 번쩍 뜨였다. 상? '머리 올리려다 병걸렸다던, 왜, 그…' '아아- 아까운 나이에 갔네, 쯧…' '어쨌든 기방에서 상치르면 재수없다니까, 당분간은 안 가시면 안 가시는대로…' 토마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 봐."
이야기를 듣는 토마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유곽 한구석에서 죽어간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부풀려질 거리도 없다. 얘기를 듣던 토마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키가 커 이렇게 아래에서 보면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우뚝하다. 긴 다리를 망설임도 없이 움직여 성큼성큼 문 쪽으로 향한다. 안 물어도 어디 가는지 뻔했다. 아직 대낮인데요, 도련님!
-
"그간 발길을 뚝 끊으셔서 이렇게 누추한 곳은 이제 질리셨을까 저는 정말-"
이 여자의 아양은 이제 운율까지 있는 느낌이다. 토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 왔던 날처럼. 그 날 시야 한구석에서 발견했던 구석방의 문은 오늘은 닫혀있다. 당연한가, 이제 방 주인이 없으니… 방 주인이 없으니 방 주인을 지키던 사람도 그 앞에 없나.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참으로 착하게도 정말 코빼기 한 번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얌전히 말을 따라주었다기보다는 잠깐 져준 것에 불과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원을 잠시 들어준 모양이랄까. 실제로 지금 다시 하고싶은 대로 여기 와 서 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결국 나라사카를 발견하지 못하고 토마는 한숨을 쉬었다. 불러 줘, 천천히 준비해도 되니까. 무슨 뜻인지는 홍등가 사람이라면 다 알았다.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유곽의 주인은 금방 표정을 감추고 웃어 보였다. 예, 금방 들여보낼테니 여기 안쪽 방으로-
토마 님, 토마 님 시끄럽다. 다시 와준 게 뭐 큰일이라고. '내가 오는 건 좋은 거야.' …분명 전에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하지만 나라사카로서도 조금 놀라긴 했다. 오지 말라고 한 후 정말로 한 번을 안 오다가 이렇게 뜬금없이. 나라사카는 이제 욕조를 발로 차거나 비단옷을 구겨 던져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나흘을 쫄쫄 굶고 쌀죽을 먹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기운도 예전같지는 않았고, 또 상대가 토마라고 하니까… 그 생각을 하다 흠칫 놀랐다.
큰방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눈을 번뜩이며, 잘하지 않으면 뼈도 못추리게 해놓겠다며 몇 번을 엄포를 놓고 갔다. 하긴, 다시 토마가 찾아주어야 광고에 도움이 될 테지. 앞으로 이레 후면 '손님'을 받으라니까. 오랜만에 차려입는 화려한 옷이 어색했다. 분칠을 허벅지며 허리에까지 했다. 멍이 덜 빠져서. 아마 포주도 토마가 이렇게 갑자기 다시 찾아올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나라사카도 그랬으니까.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나라사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토마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걸어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전과 똑같은 시선, 마치 몇 주 전처럼― 오지 말라고 했던 날이나 레이 이야기를 하던 날이나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마치 그 날들 중 하루 같았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이런 걸 그리웠다고 하면 이상한가. 뭘 그리워했지, 이 거리인가, 저 얼굴인가… 또 저렇게 웃고있는 저 입매인가.
가까이 앉아 인사를 올렸다. 토마가 술병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니까 같이 한 잔 하자며. 잔은 하나밖에 없다. 작은 잔에 담긴 술을 토마가 먼저 마시고 나라사카에게 내밀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나라사카가 술을 따랐다.
"오늘은 화장 안 지워?"
"…이제 됐어요, 그런 것."
"왜?"
"이제 소용없으니까."
"내가 또 와버려서?"
"아니오."
"오지 말랬는데 왜 왔냐고 안 물어봐?"
술을 따른 잔을 나라사카는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토마에게 내민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미끄덩대는 액체가 화끈거리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술 때문에… 오랜만이라서. 오랜만에 봐서… 어쩌면 그리웠어서.
몇 번 더 잔이 오갔다. 작은 잔에 어색한 공기와 반가움과 투정이 실렸다 삼켜지고 다시 담아지곤 했다. 날이 저물어 바깥하늘 색이 많이 짙어졌다. 금방 어두워져 달빛이 비출 것이다. 토마가 창 밖을 보며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말래도 와야지. 한 모금 마시고 비어버린 잔을 건네고는.
"내가 없으면 레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잖아."
다시 술을 따르던 나라사카의 손이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으로 토마를 보았다. 웃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창을 타고 넘어와 토마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렇잖아? 같이 마을을 뛰어다녔던 얘기, 손을 잡고 잤던 얘기, 산에서 길을 잃은 얘기, 치마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얘기…" 토마의 입에서 추억이 하나씩 열거되었다. 술이 잔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라사카는 토마를 보고 있었다.
"엇, 술, 아차차-"
토마가 얼른 나라사카의 손목을 붙잡아 기울어진 술병을 바로 세웠다. 손바닥을 타고 팔목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토마의 혀가 핥아올렸다. 나라사카가 몸을 흠칫 떨었다.
"지금 눕히는 것도 좋지만… 이왕 선물을 하나 가져왔으니까 말야."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입술이 나라사카의 손가락에 입맞추고 떨어졌다. 술병은 부드럽게 빼앗아 옆에 놓고 토마는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오는 길에 피어 있었어." 천에 스치는 소리를 내며 품 안쪽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녹색 잎에 보라 꽃잎의 제비꽃이었다.
나라사카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부풀어올랐다 눈꺼풀의 깜빡거림과 함께 맑은 액체를 툭 떨어트렸다. 속눈썹 끝에 매달린 눈물이 시야를 어른거리게 했다. 툭, 툭, 눈물이 소리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보라색 꽃을 코에 대고 말간 미소를 짓던 레이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라사카는 숨죽여 울었다. 토마가 난처한 듯 웃으며 나라사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지나간 자리에 보라색 꽃이 꽂혔다. …소리내 울어도 되는데. 그 말에 대답도 못하고 나라사카는 가쁜 호흡을 죽이고 죽이며 울었다. 고운 미간을 찡그리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소리없이 내는 오열. 태어나 본 울음 중 가장 섧었다. 토마는 나라사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때보다 더 마른 듯한 등을 쓰다듬으며 귀에서부터 목을 따라 입맞추었다.
"역시 술보다 꽃이 낫구나."
술보다 꽃이 더 마음을 건드린다는 뜻일까, 울며 숨을 헐떡이는 나라사카의 귀에 토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따르는 것보다 꽃을 꽂고 있는 게 나아. 백 번 낫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너무 울어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가, 맥박이 빠르다. 나라사카는 팔을 들어 토마의 허리를 껴안았다. 허리춤의 옷을 꼭 잡고 달빛이 떨어지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울었다. 그리웠다. 이 다정이, 하염없이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