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말까 / 토마나라
토마 상의 얼굴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져 나는 계속 계속 보고 있었다. 실제로도 오랜만인지도 몰랐다, 근 2주가 넘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부풀었던 달이 기우는 데 걸리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을 그 열댓 새가 나에게는 너무나 길었다. 그 사이 해가 뜨는 시각은 조금씩 더 당겨졌다. 이제 이 시각에도 창틈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으로 토마 상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는 얇은 이불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어깨 위로 올렸다.
연애는 생각보다 어렵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꺼내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꼭꼭 숨겨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 모순된 감정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이렇게 눈앞의 얼굴을 볼 때면. 아니, 보고 있지 않아도.
토마 상은 잠이 많다. 놀거나, 총을 쏘거나, 자거나 늘 셋 중 하나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제 와서는 뭐 그런가, 하고 있다. 그나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작년까지는 거기에 ‘학교에 간다’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마저도 졸업한 지금은 정말 백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까, 보더 활동을 제외하면. 타치카와 상처럼 보더 전형으로라도 가려면 갈 수 있었을 테지만 토마 상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대학에 가서 흥미도 없는 강의 듣느라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나를 만나는 데 시간을 써 주는 편이 좋다. 지금도 이렇게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
어제는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집에 거짓말을 했다. 토마 상이 원정에서 돌아오는 날은 늘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다. 원정 후에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걸 사귀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래 트리온체로 있어서 그럴 걸?」라며 웃었다. 반 년 쯤 전, 입에서 김이 하얗게 나오던 밤의 일이다. 졸업식도 전에 먼저 독립한 토마 상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어려운 연애가 그 때도 어려웠다. 어서 보고 싶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찾아가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차가운 밤공기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나를 보며 토마 상은 난처한 듯 웃었다. 그렇게 시위하지 않아도 다녀와서 열쇠 주려고 했다고. 아, 엄청 차갑잖아, 너. 그렇게 말하는 토마 상의 몸도 차가웠다. 그래도 한가득 껴안고 있으면 두근거리는 심장이 몸을 데우는 것 같았다. 섞이는 숨이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나라사카…」
그 목소리로 불리는 내 이름을 오랜만에 들으며 몸을 겹쳤다. 새로 샀다던 침대는 예전 것처럼 끼익거리지 않았다. 정리가 덜 된 집안에 침대 부근만 말끔한 것이 토마 상 다워 웃음이 났다. 이제 누가 들을까 조심하지 않아도 됐다. 뜨거운 손이 닿을 때마다, 토마 상도 이렇게 쌓여 있었나 생각하면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다음 날 열쇠를 주며 토마 상은 진지하게 말했다. 역시 빨리 같이 사는 게 좋겠어. ……뭐야, 그 표정… 몰랐어? 침대 사이즈 봤으면 적당히 눈치를 채라고!
알아챌 리가 없다, 그런 것. 사실은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는 침대라도 상관없었다. 커다란 손이 몸을 훑을 때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어졌다. 내일 체육 수업이 있다던가, 오늘 머리가 조금 아팠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감각은 오로지 한 곳만 향한다. 마치 저격을 할 때처럼.
정말, 너는 말이야 생각보다 둔하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 쪽이 더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늘 변함이 없지만, 이렇게 가끔 토마 상은 사람을 놀라게 하곤 한다. 그리고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뭐야, 맘에 안 들어?」 하고 조금 불만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럴 때면 열아홉이나 먹은 남자가 처음 만났던 한 열여섯쯤으로 보여 어쩐지 조금 반갑기도 했다.
여섯시까지는 오 분 남짓이 남았다. 이제 해는 지면에서 꽤 많이 떠올라, 파리한 금빛을 토마 상의 집 창문 너머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 분 정도가 지나면 이제 알람이 울릴 것이다. 알람이 토마 상의 잠을 깨우기 전에 나는 시계로 먼저 손을 뻗었다. 또다시 불면증 기미를 보이는 것을 어제 겨우 잠들게 했다.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 꿈을 꿔 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꾸물대고 있다. 얇은 이불 속이 더없이 편하다. 허리를 두른 단단한 팔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아직도 낯선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닿아있는 부분이 이렇게 신경이 쓰일 리가 없다. 하지만 풀어내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온기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토마 상이 원정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조금 추웠다…
「떠나는 날이 우중충하면 기분이 좀 그렇단 말이지.」
토마 상은 의외로 감상적인 면이 있어서, 원정을 가기 전에는 꼭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내려 나를 한 번 바라보곤 한다. 나는 그 무의식적인 습관이 좋아 잠자코 붉은 기 도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다. 토마 상의 청혼(인 것 같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같이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수험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정 전후에는 되도록 꼭꼭 자고 가긴 하니까 최선을 다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살짝 웃고, 입을 맞추고, 마침내 등을 보인다. 나이트가 커다랗게 새겨진 등이 멀어진다. ……장마가 시작되어 오랜만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그 날 아침 나는 조금 춥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험생의 규칙적인 생활이 잠깐 어그러졌던 것은 토마 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장마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하는 아침 조깅을 요사이 잘 지키지 못했다. 등교 전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뛰기로 정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더에 입대하며 새로 들인 습관이다. 학업과 임무를 병행하려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해야 하는 것들’이 생겼다. 부대 회의라던가, 훈련이라던가, 토마 상은 잘 하지 않고 나는 꼬박꼬박 하는 것들. 그래도, 굳이 건물 어딘가에서 딱 훈련이 끝날 때까지 낮잠을 자다가 같이 돌아가자며 어슬렁 나온다던지 하는 토마 상이 좋았다. 후유시마대의 회의 중에 라인을 보내오다가 메세지가 뚝 끊기는 순간이라던지(마키에게 들킨 것이다)도 좋았다. 숙제를 하고 있으면 노트의 귀퉁이에 히라가나로 ‘나라사카’라고 쓰는 낙서도 좋았다. 이름 정도는 한자로 써, 라고 말하면 샤프를 쥔 내 손을 겹쳐 잡고 무언가 악필을 내 노트에 남기곤 했다. ‘토마 상 너무 좋아’ 같은 낙서를. 그렇게 일과를 방해받곤 했다.
토마 상의 졸업과 동시에 나는 3학년이 되었고, 보더 전형으로 대학에 갈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좀 더 공부에 시간을 쏟기로 했다. 아라후네 상이나 카자마 상의 조언을 들으며 계획을 짠 결과, 시간은 조금 더 촘촘히 메워지게 되었다. 학교와 임무와 공부와 훈련이 번갈아가며 자리를 차지하는 시간표는, 그러나 토마 상 때문에 평소에는 정말로 방해를 받기 일쑤다.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토마 상이 원정을 가 있는 동안에도 나는 전혀 한가해지지 않는다. 조금씩 쌓인 밀린 분량들을 토마 상이 없는 동안 해치워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번 원정 기간 동안 계획대로 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다. 꼬박꼬박 여섯 시에 일어나 놓고도,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조깅은 포기해야 했다.
‘오늘은 비가 안 오네…….’
하필 오늘. 어제까지 매일매일 비가 오다가, 하필 오늘은 맑다. 조용한 새벽 공기 틈으로는 어떤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잠든 토마 상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돌아왔으니 아마 오늘은 내내 아무 스케줄도 없겠지, 토마 상…
오랫동안 조깅 스케줄을 지키지 못했다. 장마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빗줄기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내일도 모레도 날씨가 어떨지 모르니, 마침 비가 오지 않는 오늘만큼은 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얇은 이불 속 맞닿은 맨살이 너무 따뜻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보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둥근 눈, 조금 굴곡진 코, 시원스럽게 큰 입, 짧은 턱, 약간 튀어나온 목젖, 뒷목을 살짝 덮은 검은 머리카락.
오늘은 내내 아무 스케줄도 없겠지, 토마 상.
조깅을 다녀와도 아마 계속 자고 있을 테지. 학교에 다녀 온 다음에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겠지. 오늘은 미와대도 임무가 없으니까, 개인 훈련만 하고 나면 아마 같이 저녁을 먹고……
마침내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떨어져내렸다. 이렇게 바보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을 토마 상은 알까, 조깅을 하러 가는 그 30분을 아까워하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하긴, 알아도 곤란하다. 문득 쳐다 본 시계는 6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던 시각에서 이미 10분도 넘게 지났다. 허리께에 위치한 토마 상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침대 위에 놓고, 옷을 챙겨 입으려고 몸을 틀었다.
“……!”
“벌써 가?”
잠이 덜 깨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 머리를 세팅하지 않아 이마 위로 잔머리가 흩어져 있다. 그 사이로 가늘게 뜨인 눈이 보인다. 토마 상은 내가 침대 위에 올려놓은 팔을 다시 들었다.
“학교 가는거야?”
내 손목을 붙잡은 토마 상의 손이 따뜻하다. 부스럭대며 토마 상은 몸을 틀었다. 옆으로 누워 있었던 몸을 틀어 바로 누우며, 다른 손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몇 신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다.
“6시. 조깅하고 오려고… 학교는 그 다음에.”
“뭐야, 6시밖에 안 됐잖아―…”
“더 자, 토마 상.”
대답이 없다. 그러면서도 내 손목을 붙잡은 손은 풀지 않아서, 나는 잠깐 생각하다 손을 놓게 하려 팔을 들어올렸다. 이제 시계는 14분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 나가도 평소만큼 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앗…!”
토마 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끌어당겨진 손목부터 침대에 쓰러지고, 침대와 몸이 둔탁하게 부딪치면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잡아당긴 팔로 내 어깨를 감싸며 토마 상은 다시 몸을 틀었다. 바로 누웠던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즉 한 팔로 나를 안은 채로 이불을 위로 끌어당겼다. 거의 완벽하게, 일어나기 바로 전의 자세로 돌아가 버렸다.
“자자, 나라사카….”
“아니, 나는,”
“나 어제 돌아왔다고―”
“그러니까 토마 상은 더 자, 나는―”
“어제 겨우 다시 봤잖아……”
“토마… 상.”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토마 상은 나를 더 끌어당겼다. 바싹 닿은 맨몸이 따뜻하다. 눈앞에는 토마 상의 곧은 목이 보인다. 고개를 한껏 위로 해 겨우 확인한 머리맡의 시계는 6시 17분을 가리키고 있다. 최근 거의 없었던, 비가 오지 않는 아침.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학교에 가려면, 지금 이 팔을 뿌리치고 나가도 아마… 길어야 20분……
‘어제 겨우 다시 봤잖아…….’ 잠긴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울렸다. 조깅을 하러 나가는 30분이 아까운 건 내 쪽이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 단단히 껴안고 있는 것은 토마 상. 잠이 부족한데도 내 기척에 눈을 뜨는 것은 토마 상. 다시 몸이 겹쳐지도록 손목을 잡아끄는 것도, 토마 상….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어도 그저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응? 나라사카….”
토마 상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한다. 빠져나가게 하지 않겠다는 듯이. 좋아하는 인형을 힘껏 끌어안은 어린아이 같다.
내가 내쉬는 숨이 토마 상의 쇄골을 간지럽힌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도 토마 상은 이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토마 상과 사귄 지는 벌써 반년도 더 됐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싹 닿아 있다는 것만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이렇게 몸이 겹쳐져 있으면 얇은 피부를 지나 심장 소리도 바로 전달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별로 알리고 싶지 않은데. 아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지금은 6시 20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할 수 없나…….
내일 아침도 비가 오지 않기를 기원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토마 상이 가볍게 웃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눈앞의 목젖이 조금 움직였으니까.
“나라사카,”
“…응…..”
“학교, 언제 가지?”
“7시 반…?”
사실 7시 20분 쯤에는 나가야 한다. 그래도, 10분 정도 늦게 나가는 것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침 조깅을 하지 못했으니 조금 뛰어간다고 생각하면.
“나라사카아―”
토마 상이 턱을 내 머리 위로 올리며 이름을 불렀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따라 울리는 목의 진동이 이마로 전해져온다. 조금 간지러운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안 가면 안 돼?”
맘에 드는 인형을 끌어안고, 토마 상은 열여섯 살 정도로 돌아간 듯하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사락대며 베개에, 토마 상의 턱에 비벼진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토마 상은 말을 잇는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드문드문 귓가를 간지럽혔다. 조깅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말이 되는 소릴 해, 토마 상.”
웃음기 섞인 내 대답을 무시하고 토마 상은 결국 다리까지 들어 내 허벅지 위로 올렸다. 팔과 다리가 한 짝 씩 내 몸을 두르고 있다. 이불 밑의 그런 우스운 자세로 토마 상은 중얼거렸다.
“……이대로 있자.”
그리고 더욱 우스운 것은,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유혹적이라는 것이다. 나도 팔을 들어 토마 상을 안았다. 조금, 조금만 이러고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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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리렴…
+) 당분간 원고 때문에 업데이트가 뜸할 듯 합니다. 소식이 궁금하신 분은 언제든 트위터에서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