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BBF 관련 네타가 굉장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유시마와 아즈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흡연자입니다.

이외에도 과거 날조 망상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처음 만났던 것은 12년쯤 전. 웃는 얼굴이 취향이라고 생각했었다.




<비밀> 후유아즈 번외






◀◀ -12years, 아즈마 하루아키 21세




걸음을 재촉했다. '트리온체'라는 것은 무척 편리해서 딱히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할 필요도 체력이 떨어질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트리거 오프를 하면 격렬한 흡연욕구가 든다는 것을 보더에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즈마는 깨달았다. 트리거 기동을 하고 있는 동안 실제 몸은 계속 잠을 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트리거 기동 중에는 (생체에 링거바늘이라도 꽂아놓지 않는 한) 니코틴을 보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즈마는 트리거 기동 해제를 하면 바로 잠에서 깨어난 몸이 강렬히 니코틴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더 건물은 벽도, 훈련실도, 심지어 흡연실도 깨끗했다. 아마 흡연을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가 않아 그럴 것이다. 이 깨끗한 공간을 앞으로 몇 년이나 담배연기로 꾸준히 더럽히게 될까 상상하며 아즈마는 한 개비를 뽑았다. 문득, 트리온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으니 담배연기에도 무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입대한 동기 아닌 동기들은 죄다 어렸다. 타치카와 케이, 열여섯. 카자마 소야, 열일곱. (심지어 두 명밖에 안 된다.) 원래 보더에서 활동 중이던 몇 안 되는 대원들도 (진 유이치(15)와 코나미 키리에(13), 키자키 레이지(17)) 성인이 되기는커녕 열세 살이면 초등학생이다. 전투원으로 입대했으니 훈련실 쪽으로 출근하면 곧 초등학교 졸업식 이야기를 하는 코나미의 목소리와 교복을 입은 다른 대원들이 보였다. 그 안에서 어제 대학교 동기들과 회식을 하고 숙취로 머리가 아픈 아즈마 하루아키는 잠시 소음을 들어 주다 흡연실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십대 아이돌 기획사에 잘못 굴러들어온 엔카 가수가 된 기분으로.


후유시마를 처음 만난 것도 흡연실이었다. 어른의 상징인 길고 가는 하얀 막대를 입에 물고, 아즈마는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 위를 열심히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전 여자친구가 선물해 주었던 귀중한 듀퐁라이터를.


"오― 듀퐁이잖아. 기름 떨어진 거 아냐?"

"나도 알……."


무심코 대답하다가 처음 듣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싱겁게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즈마는 여전히 라이터의 상단을 엄지로 밀며 아무런 수확 없이 철컥대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기름이 떨어진 건 첫 번째에 바로 깨달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서였다.


"빌려 줄까?"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는 라이터를 내밀었다. 


"―듀퐁은 아니지만."

"…고마워."


몇 살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얼굴. 상대를 따라 경어를 생략한 아즈마는 라이터를 받아들고 엄지손가락을 움직였다가 또다른 실패를 맛봐야 했다.


"뭐야, 듀퐁만 써서 일반 라이터는 못 쓰는 거야?"

"그럴 리가."


못하잖아, 낄낄 웃으며 남자가 아즈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즉각 아즈마의 항변이 이어졌다.


"이것도 기름 다 떨어졌다고."

"그럴 리가…?"


아즈마의 말을 따라하며 남자가 고개를 숙여 아즈마가 들고 있는 라이터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당신이 방금 붙인 게 이 녀석이 낸 마지막 힘이었어. 중얼거리는 아즈마의 목소리에 남자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직 라이터를 쥐고 있는 아즈마의 손 위를 겹쳐 잡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아즈마가 놀란 사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즈마의 손을 감싼 채로 아즈마의 엄지손가락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아즈마의 손가락을 누른다. 남자의 손톱 끝이 흰색으로 질린 것이 보였다. 모르는 새에 어깨에 남자의 가슴께가 닿아 있었다. 남자는 머리카락이 긴 편이었다. 뺨에 닿아오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그렇게 원하던 담배 냄새가 났다. 남자는 힘을 준 손가락으로 빠르게 아즈마의 손가락을 뒤로 밀었다. 


―철컥.


조용한 흡연실 안 부싯돌 소리가 울리고,


"아, 뭐야. 진짜 기름 다 떨어졌잖아?"


남자의 허탈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거 봐."


어쩐지 목소리가 쥐어짜내는 것처럼 나온다고 생각하며, 아즈마는 이윽고 몸에서 떨어진 남자의 상체에 안도했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손바닥에 올려 둔 라이터를 쳐다보다가 몇 번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 번 철컥대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결국 포기했다. 


"미안, 대신 불 옮겨줄게. 담배 다시 물어 봐."


명령할 의도가 없는 명령에는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순순히 담배를 문 아즈마의 얼굴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얼굴의 아래쪽에서 빨간 불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강렬하게 욕망했던 것이 점점 가까워진다. 아즈마는 빨간 점화지점에서 조금씩 시선을 올렸다. 위로 살짝 올라간 입매와 싱겁게 웃고 있는 눈이 담배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림자가 아즈마의 얼굴을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덮었다. 


담배의 끝과 끝이 서로 만나있는 동안 아즈마는 숨을 참았다.


"…됐지?"


짧은 순간이 지나치게 길게 자리하고 난 후 남자가 숙였던 어깨를 폈다. 아즈마와 키가 엇비슷해 보이는 남자는 가까이서 보니 연기 같은 잿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아즈마는 시선을 떼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내쉬는 숨과 함께 담배 연기가 둘 사이를 가렸다 흩어졌다.


"아즈마 하루아키."

"오, 나는 후유시마 신지."


갈구하던 니코틴이 빠르게 온 몸을 돌았다. 딱히 헤비스모커는 아니지만 어쨌든 실제 몸에게는 지금이 잠에서 깨어난 직후와도 같아서, 연기를 내뿜으며 아즈마는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담뱃불을 빌려준 은인에게 말이 뾰족하게 나갈 일도 없어 아즈마는 다시 천천히 숨을 뱉으며 물었다.


"전투원…은 아니지? 본 적이 없는데."

"아아, 엔지니어야…… 라는 건, 설마 전투원이야?"

"그런데."

"아, 아니, 전투원은 애들밖에 없는 줄 알고."

"……애들밖에 없어."


또다시 엔카 가수의 기분을 느껴야 하나 생각하며 아즈마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애들 중 하나야." 싱거운 눈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싱거운 농담을 했다. 니코틴이 들어가 좀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다. '후유시마 신지'가 킥킥댔다.


"몇 살인데?"

"스물 한 살."

"오, 뭐야. 진짜 애 맞았잖아."


덕분에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이 조금 커진 쪽은 아즈마가 되었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보더 상층부 사람들 같은 '진짜 어른'들을 제외하고는 아즈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다. 그 말은 즉 아즈마가 제일 연장자였다는 이야기다. 그건 딱히 누굴 탓할 일도 뭐가 잘못된 일도 아니었고, 나이와는 무관하게 선배나 동기 전투원들 모두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배울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즈마는 뭐랄까… 아직 덜 익숙했다. 교복으로 채워진 라운지나 란도셀을 멘 여자아이라던가, 엄마 오리를 보듯 아즈마를 올려다보는 시선, 그런 것에. 가장 연장자이며 누군가에게 늘 조언을 건네는 입장이 되는 것도.


"그 쪽은 몇 살인데?"

"음? 스물 다섯처럼 보이지 않아?"


그 말을 하며 후유시마 신지는 씨익 웃었다. 차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주지 못하고 아즈마는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웃는 얼굴이 조금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참았다 흡입한 니코틴 때문일 거라는 의심과 함께.





여름



보더의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아즈마는 바빠졌다. 스나이퍼라는 포지션이 신설되어서였다. 신설되었다고 해도 보더 내 스나이퍼는 아즈마 하나뿐이었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틀을 짤 수 있었다. 기본적인 특성과 전략, 사용하는 무기, 훈련법 등 생각할 거리는 얼마든지 많았다. 대학의 여름 방학을 이용해 아즈마는 본격적으로 개발부와의 협업에 들어갔다. 후유시마 신지를 더 자주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종종 흡연실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실제 같이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후유시마 외에도 몇 명의 엔지니어들이 프로젝트에 더 참여했다. 아즈마는 몇 주를 기본적인 무기 디자인과 세팅에 대해 토론하며 보냈다. 후유시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슥슥 도안을 그리다가, 퍼뜩 뭔가 생각난 듯 옆에 메모를 갈겨썼다가, 다음날 놀라울 만큼 세세한 모형을 즉각 만들어오곤 했다. 컴퓨터로 가상 트리온을 장전해 총을 쏠 때의 거리감과 위력을 계산하기도 했다가 밸런스 도표를 만들기도 했다가, 사실 아즈마보다도 후유시마가 더 바빴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전쟁 무기 관련 서적을 주말마다 찾아보던 아즈마도, 결국은 책을 대출해 와 개발부에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짬짬이 읽기 시작했다.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후유시마는 책상 위에 몇 십 개는 되어 보이는 종이컵 더미를 만들어냈다. 하나같이 바닥에 커피가 말라붙어 있는. 후유시마에게는 아즈마의 스나이퍼 건 이외에도 트리온 설비 관련 일이 몇 개인가 더 쌓여있었다. 엔지니어라는 거 빡세구나―라고 생각했다.  


"빡세게 사네― 아즈마."

"응?"

"대학생이잖아? 방학 때 좀 더 쉬라고."


눈 밑이 퀭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잠깐 생각했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의자를 빼 아즈마의 옆자리에 앉은 후유시마는 몇 장의 도안을 뒤적거렸다. 하얗고 큰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며 큰 손 아래에서 헤집어졌다. 물끄러미 손가락 끝을 보다가 아즈마는 후유시마의 손톱 끝이 꽤 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후유시마 상, 집에 못 간 지 며칠?"

"으음― 일주일…?"

"…그거 착취 아니야?"

"어쩔 수 없지. 트리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


그다지 널리 널리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고. 있는 사람으로 버텨봐야지. 중얼중얼 대답하며 후유시마는 휙휙 종이를 넘겼다. 


"빡세게 사네……."

"어른이니까."


대답하며 후유시마가 히죽 웃었다. 빠르게 종이를 걸러내던 후유시마는 한두 장을 빼내어 옆에 둔 후, 몸을 일으켜 랩톱을 가져왔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까만 화면의 중심부에 오브젝트가 떠올랐다. 랩톱의 화면을 아즈마 쪽으로 돌린 후유시마가 자랑스레 말했다.


"프로토타입 완성됐다고."


옆에 빼 둔 종이들 위에는 프로토타입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후유시마는 마우스를 사용해 화면에 떠올라 있는 총의 각도를 이리저리 돌렸다. 늘씬하게 빠진 총구가 화면 속을 둥글게 돌았다. 곧은 선을 그리는 총신 위 장식처럼 달린 가늠쇠, 튼튼해 보이는 손잡이가 차례로 아즈마의 눈 앞을 지나갔다. 화면에 고정된 아즈마의 시선이 만족스러운 듯 후유시마는 몇 번이고 총신을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으로만 볼 게 아니지."


탁, 하고 랩톱의 모니터를 아래로 닫아 버린 후유시마에 아즈마가 의문 섞인 시선을 돌렸다. 후유시마가 일어서자 뒤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아즈마를 내려다보며 후유시마가 웃었다. 


"저쪽에 진짜가 있어. 가자."






"무기를 만드는 건 이쪽이지만 말야, 쓰는 건 전투원이니까."


몇 주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물건이 손에 만져진다. 아즈마는 손에 든 장총을 이리저리 살피며 아무 말이 없었다. 매끈한 총신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입술이 조금 벌어진 줄도 모르고 아즈마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보았다가 총구를 쓰다듬어 보았다가 했다. 기말고사 기간부터 정신은 이미 '스나이퍼'라는 포지션에 쏠려 있었다. 몇 주를 내내 골몰하며 보냈다. 마침내…… 아즈마는 아주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감동이라는 건 아마 이런 감정을 말하는 거겠지―….


"쏴 보지 그래? 그래야 우리도 보완할 점을 알…"


―탕!


후유시마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말, 말하고 쏘라고! 덩치가 커다란 후유시마가 어깨를 움찔대는 것이 우스워 아즈마는 낮게 웃었다. 손 안에 쥔 총은 단단하고 차가워 어느 타깃이든 문제없이 맞출 것 같았다. 총구 끝을 다시 한 번 앞으로 향해 보았다. 


"가늠쇠 말인데, 그 정도 높이면 괜찮을까 하고―"

"아아, 좋은데."

"그래? 이거 프로토타입이라 지금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해. 가령 이렇게 하면…."


총구 끝에 눈을 맞춘 아즈마의 시야에 후유시마의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조금쯤 조절할 수 있게 두었는지 후유시마의 조정에 가늠쇠의 높이가 약간 흔들렸다. 이건 괜찮아? 라고 묻는 목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갑자기 큰 손이 닿아왔다. 


"조금 더 숙여보면?"


아즈마의 뒤통수를 덮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후유시마가 말했다. 가늠쇠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아즈마는 숨을 들이켰다. 후유시마의 손은 아직 아즈마의 머리 위에 있었다. 단단한 체온이 머리카락을 타고 귀까지 닿아오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듯한 지금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다.


"영화 같은 데 보면 이렇게…… 하는 것 같던데 말야."


대답 없는 아즈마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말하며 후유시마는 가늠쇠에 두었던 손으로 총을 들고 있는 아즈마의 팔꿈치를 끌어당겼다. 방아쇠에 걸고 있던 손가락 끝까지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대충 이런 자세더라고. 어때? 불편해?"


"이쪽 사람"은 "이쪽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아즈마는 후유시마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알아챘다. 「스트레이트.」그래서 말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 없이 손을 대면 위험하다고. 나 같은 사람에게.


"아니…… 괜찮아."

"좀 쓸 만한 것 같지?"


뿌듯한 감정이 바로 드러나는 목소리가 귀 옆에서 들렸다.


"아직 손봐야 할 곳이 많지만, 이제 대략 방향은 잡혔으니까."

"아아…."

"보더 엔지니어들, 꽤 우수하지?"


그 말을 할 때는 어떤 얼굴로 웃고 있나 궁금해 아즈마는 가늠쇠 쪽으로 고정시켜 놓았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맡겨 놓고 대학생은 좀 더 대학 시절을 즐기라고. 매일 칙칙한 아저씨들 틈에 와서 앉아있지 말고."

"……."

"아, 그래도 가끔씩은 오긴 와야 돼. 보완할 사항이 아직 잔뜩 있으니까."


어떻게 하나… 아즈마는 생각했다. 첫 번째는 니코틴 때문인 줄 알았지. 그럼 지금은 첫 무기 때문인가? 그런 식으로 이미 알아채버린 감정을 속여도 괜찮나? 그래도 좀 더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데. 스트레이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데.


위를 올려다보면 후유시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여전히 아즈마의 취향대로.






◀◀ -11years, 아즈마 하루아키 22세


가을



아즈마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올려 둔 휴대폰이 간헐적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규칙적이지 않은 것을 보니 전화가 아니라 메일이 두, 세 통 정도 연달아 오는 모양이다. 


아즈마상―!오늘

괜찮으시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

러 갈까요? (신난 고양이 이모티콘과 고기 이모티콘)


아, 방금 클래스

메이트가 알려줬

는데 저 축제 준

비 해야한다고… (울고 있는 소년 이모티콘 두 개 연달아)


아! 아즈마상 내

일 혹시 시간 괜

찮으시면 저녁때

같이 먹어요~~ 

그리고 축제날에

놀러와 주세요!

사격 게임 같은

걸 하는 반도 있

는 모양이에요! (총 이모티콘과 폭죽 이모티콘과 신난 고양이 이모티콘)

 

왜인지 아즈마는 보더의 전투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토리 켄은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학생으로 스나이퍼 지망이라 아즈마와 금방 친해졌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기도 해서 종종 밥을 같이 먹게 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 교실 뒷줄에 앉아 열심히 메일을 보내다가 축제 준비라는 것을 알고 황급히 다시 휴대폰을 두드리는 사토리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져 아즈마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첫째 이유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기 때문에, 


"뭐야? 재미있는 메일?"


둘째 이유는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움직이자 휴대폰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접혔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아직까지 지끈거렸다. 주량을 넘어서까지 마시는 일은 보통 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남자가 팔을 들어올려 아침 인사를 했다. 아, 역시 또…….


"별 거 아냐."

"그래? 그럼 나 먼저 화장실 쓸게."


가볍게 대답하고 남자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그 벗은 뒷모습을 보며 아즈마는 한숨을 쉬었다. 살짝 이불을 들추자 예상했던 대로 전라다. 뭐, 남자가 벗고 있었으니 굳이 확인 사살할 것도 없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또 회색 머리…."


일어섰던 것을 대충 보았지만 키도 아즈마와 엇비슷해 보였다. 아즈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베개에 파묻었다. 정말 귀신같은 솜씨다. 아즈마가 꽤 큰 편이기 때문에 비슷한 키를 찾는 것만도 어려운 일인데 그 취한 상태에서 심지어 머리카락이 잿빛인 사람만을 골라내 침대로 데리고 온다. 그래도 그나마 눈동자색 까지는 맞춘 적이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목표를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타깃을 정확하게 노리는 솜씨. 아무래도 스나이퍼가 제대로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아즈마는 그렇게 자조 섞인 농담을 생각해내다 다시 지끈거려 오는 머리에 결국 눈을 감았다. 최근 보니 머리카락이 좀 길었던데, 나중에는 큰 키에 잿빛 머리카락에 장발이라는 더 까다로워진 조건을 따지게 될지도 모른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조건이 추가되어도 문제없이 그런 남자를 찾아내 성공적으로 침대로 끌어들일 것 같다는 점이지만.






◀◀ -9years, 아즈마 하루아키 24세


여름



아즈마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린 얼굴들이 곳곳에 보인다. 다들 트리온체다. 이곳은 틀림없는 랭크전실.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의 얼굴을 보았다. 비슷한 눈높이에 익숙한 잿빛 머리카락에 즐겨 입는 검은색 티. 틀림없는 후유시마다.


"후유시마 상?"


후유시마가 멋쩍은 듯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쩌다 보니… 전투원이 됐어."





함께 라운지에 앉다니 굉장히 이례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즈마는 녹차가 담긴 페트병의 뚜껑을 땄다. 늘 개발실에서 보던 얼굴을 랭크전실에서 본 것에 이어 함께 라운지로 오다니, 처음이다. 엔지니어들은 보통 개발실에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개발에 참여한 무기가 전투에서 잘 사용되는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 녹화된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작전실 생긴 것은 좋던데. 거기서 잘 수도 있고."

"아니, 잘 생각을 하지 말고 집에를 가."

"아, 그렇지. 하도 안 가다 보니……."


키누타 상은 어쩌면 지독한 상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즈마는 녹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럼 이제 엔지니어는 그만 두는 거야?"

"아니, 아마 간간히 참여할 것 같긴 한데."


키누타 상은 아마 지독한 상사가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온 거야?"

"뭐, 스나이퍼랑 한 팀 하는 것 재미있겠다 싶기도 했고……."


토마와 한 팀이라고 했다. 당신도 참 스나이퍼와의 연이 강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토마는 아즈마의 제자로, 저격 센스가 뛰어나 금방금방 쉽게 실력을 쌓아갔지만 부대 랭크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스나이퍼 1인과 오퍼레이터로 구성된 단촐한 부대는 스나이퍼가 발견되면 끝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유시마가 가세하면 단숨에 상황이 달라지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즈마대는 아마 후유시마대(부대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와 싸워보기 전에 곧 해산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애가 스카우트 했다고, 여자애가. 곧 여고생이 되는."


'여'자를 세 번 반복하며 뿌듯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후유시마를 보며 아즈마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야, 나도 이제 여고생이랑 한 부대야."


그동안 아즈마대의 카코가 그렇게 부러웠던 걸까……. 아니, 그보다 어느 부대로 가든 오퍼레이터는 여자아이일텐데. 아마도 여자아이가 먼저 제의를 해왔다는 걸 너무나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맥락을 듣자 하니 전투원으로 아예 부서 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엔지니어 일과 겸업하는 수준인 것 같은데 일을 늘리면서까지 이쪽으로 온 셈이다. 여자 아이란 대단하네……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스트레이트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스트레이트를 좋아하는 일도 어쩔 수 없다. 어쩔 방도가 없다. 


"후유시마 상."

"응?"

"아저씨 같은 말은 그만 둬."


실없이 빙긋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 외에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반갑고 서글픈, 답이 없는 마음을 표현할 말 같은 게 떠오를 리가 없었다.






◀◀ -6years, 아즈마 하루아키 27세




후유시마대가 해산했다. 아즈마는 세 번째 아즈마대를 이끌고 있었다. 세 번째 아즈마대가 막 A급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은퇴 직전까지 원정조였던 부대라니, 멋진데, 후유시마 상."

"부대가 A급 1위였을 때 갑자기 해산한 사람한테 듣고 싶지 않은데."

"여고생 오퍼레이터가 졸업할 때 되니까 해산이라니, 너무하지 않아?"

"지금 그 말이 더 너무하지 않아?"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볼 수가, 더 이상 여고생이 아니어도 마키는 소중하다고. 항변하는 후유시마를 보고 웃으며 아즈마는 조금 키누타 상에게 감사했다. 키누타가 놓아주지 않아서 후유시마는 전투원에서 은퇴하더라도 다시 개발부서로 돌아간다. 은퇴가 은퇴가 아닌 셈이다. 앞으로도 종종 본부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간 이그렛이나 아이비스, 라이트닝, 더미 비콘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처럼. 종종 같이 술도 마실 것이다. 그간 스와대 작전실에서 다함께 그랬던 것처럼. 


"아저씨는 지쳤어, 이제. 개발부에서 먹고 자고 할 거야."

"아니, 집에를 가라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살짝 꺼내 확인한 화면에는 얼마 전부터 만나기 시작한 여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멋진 여성이다.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키가 크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시내의 한 발전소에서, 엔지니어로.


아즈마는 메일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후유시마의 살짝 웃는 눈이 그런 아즈마를 보고 있었다. 그저 시간을 확인한 척 아즈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집에 안 갈 거면―"

"오, 좋아. 마시러 갈까?"


이런 때만 눈치가 빠르다. 그래도 그런 점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5years, 아즈마 하루아키 28세


늦여름



음악은 머리가 아프도록 크게 울려 퍼졌다. 아즈마는 음악 때문인지 셔터 소리 때문인지 웅성거림 때문인지 이유를 파악하기 힘든 두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늦어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없었던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이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더 늦을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버렸다는 것 정도.


신부 입장까지 다 끝나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하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우아하게 퍼진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등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면사포가 자연스럽게 드레스와 이어졌다. 순백의 예복을 갖추어 입은 신부는 가녀린 뒷모습을 보이며 점점 멀어졌다. 저 앞에 서 있는 후유시마의 옆으로.


식장까지 오는 길은 한여름의 열기도 한층 가라앉아 이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초목이 무성했다. 딱 알맞은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계절이다. 하늘은 깨끗하고 맑은 푸른 색. 화가 날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결혼식에 왔으니 축복을 해 줘야 할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아즈마는 물끄러미 앞을 보고 있었다. 신부의 다소곳한 손이 후유시마의 손 위에 올려지는 것을, 두 사람이 뒷모습을 보이고 주례 앞에 선 것을, 미동조차 없이 얌전히 서 있는 하얀 뒷모습을, 작고 하얀 손을 부드럽게 잡은 후유시마의 손을, 신부의 그 당당한 위치를. 


딱히 후유시마에게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질투가 날 것도 허탈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담배가 피고 싶어지긴 했다. 아즈마는 잠깐 뒷모습으로부터 눈을 돌려 식장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이 잔뜩 보였다. 아마도 지루했던 듯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던 타치카와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손을 들어 올려 인사하려다가 멈칫하고 반쯤 들어 올리던 팔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즈마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다행히 챙겨 왔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슬쩍 몸을 돌려 조용히 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늦어서 뒤쪽 벽에 서 있었기 때문에 금방 목적지에 도달했다. 아즈마는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살짝 문을 밀었다. 최소한으로 연 문틈으로 몸을 빼내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가장 좁은 틈으로 마주보고 있는 신랑 신부가 보였다. 가까워지던 둘의 얼굴이 겹쳐지기 직전 문이 완전히 닫혔다.






◀◀ -3years, 아즈마 하루아키 30세


겨울



보더에는 한 가지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보더 상층부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전부 독거남이 된다는 소문이다. 어쩌면 소문보다는 미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혼남이든 이혼남이든 별거남이든 상층부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물들이 죄다 독거남인 것에는 틀림이 없으니 마냥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기도 하다. 2년 전 후유시마가 결혼함으로 인해 첫 예외가 생기나 싶었던 미신은, 이번 소식으로 인해 더 강력한 신빙성을 띄게 되었다.


그래도 2년을 버텼으니 아내가 꽤 오래 인내하기는 했다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남편이 취식과 취침을 죄다 회사에서 하는데 좋아할 부인이 어디 있을까. 보더에 다니며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는 결혼을 앞둔 대원이라면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바람이 막 쌀쌀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소장을 제출한 후유시마는 이후에도 서류를 제출하기 전과 다름없이 대부분의 취침과 식사를 트리온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해결했다. 이혼 전이나 후나 겉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다.


술을 자주 마신다는 것은 아즈마를 비롯한 몇몇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유카아……."


때로는 주량을 훨씬 넘어서까지 마신다는 것도. 아즈마는 눈이 풀린 후유시마를 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후유시마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져다 가볍게 부딪쳤다. 챙,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고, 부딪친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넘긴다. 


"그만 마셔, 유카……."


아까부터 눈앞의 사람이 하는 헛소리를 못 들은 척 하기 위해서. 저런 착각을 위해서 머리 길이를 단발로 유지했던 것이 아니다. 저런 말을 들어 주려고 오랜만에 후유시마의 집에 온 것이 아니다. 집으로 가서 한 잔 하자고 하면 그 핑계로 후유시마를 오랜만에 집에 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제안한 것이었다. 딱딱하고 작은 수면실 침대 같은데서, 아니면 개발실 소파 같은 데서 쭈그리고 자지 말고 푹신하고 넓은 집 침대에서 좀 쉬라고. 당연하게도 그런 숨은 의도를 알아챘을 리 없는 후유시마는 눈을 꿈뻑이며 아즈마를 힘겹게 보다 다시 팔을 뻗어 술이 반쯤 남아 있는 잔을 들어올렸다. 내가, 마셔줄게……. 


"어이가 없네."

"미안하다고 했잖아……."


서른 살 먹은 남자를 지금 그 가녀리고 예쁘고 단정한 미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그게 가능한가. 황당한 착각 대상이 된, 서른 살 먹은 바이섹슈얼 남자는 지금 어이없음을 넘어 살짝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얼굴이 붉어진 후유시마를 보며 아즈마는 슬쩍 장단을 맞춰 주었다.


"언제?"

"앞으로 집에…… 일찍일찍 들어올 테니까, 응? 유카…."

"흐응… 얼마나 자주?"

"매일매일! 정말이야…!"


저 거짓말을 얼마나 자주 그 여자에게 했을까. 아즈마는 술을 홀짝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 물음에 말이 없어진 후유시마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몇 차례 흔들었다. 뒤로 다 묶이지 않은 잔머리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결혼을 앞두고 후유시마는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잘랐었다. 다른 사람 같다고 감탄과 놀림이 반씩 섞인 시선을 받았던 깔끔한 스타일은 결혼 후 몇 달 동안인가 유지되었다가 서서히 본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었다. 그랬다가 중간에 한 번, 다시 짧아졌다 이혼서류를 제출했을 무렵엔 완전히 도로 길어져 후유시마는 전처럼 머리카락을 묶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다시 자를 일이 없을 것이다.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것도 괜찮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짧고 단정한 머리를 했던 후유시마를 좀더 자주 봐둘 걸 그랬다.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사람이란 이렇게 이기적이다.


만취해 눈앞의 사람도 구분하지 못하는 후유시마를 보며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시야에 후유시마의 얼굴이 불쑥 커졌을 때 아즈마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술잔을 들어 올리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눈이 커진 아즈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후유……,"


말은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물리적으로.


닿아오는 혀끝에서는 씁쓸한 술 맛이 났다. 입술은 푸석하면서 따뜻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는 상황에 딱 어울렸다. 후유시마의 혀가 아즈마의 입 안을 훑고 혀끝을 감아올렸다. 애무하듯 혀를 건드리다 슬쩍 빠져나가 아즈마의 입술 끝을 가볍게 핥았다. 


"믿어 줘."


키스의 끝은 달콤하고 씁쓸했다. 후유시마의 눈이 풀려있지 않았다면 완벽할 뻔 했다. 그래도 아즈마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점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웃고 있지 않은 얼굴도 취향이라는 것을 새로 발견했다.






정말로 한 9년쯤 전에 말해주었어야 했다. 생각없이 손을 대면 위험하다고, 나 같은 사람에게. 당신을 거부해주지 않을 거니까…… 기꺼이 손길을 받아들일 테니까. 허리에 닿아오는 뜨거운 손을 떼어내기는커녕 아즈마는 후유시마의 목을 잡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쇄골이 후유시마의 숨으로 간지러웠다. 큰 손이 허리를 타고 내려가 바지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손으로 바지 단추를 풀고 끌어내리며, 허리를 타고 내려간 손은 아즈마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아즈마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려 후유시마의 손이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후유시마의 허벅지를 타고 앉아 마주본 자세로 아즈마는 고개를 숙였다. 후유시마가 고개를 들자 그대로 그의 뒷목에 아즈마는 잇자국을 남겼다. 머리를 묶으면 그대로 드러나는 위치에. 잠시 움찔했던 후유시마는 다시 아즈마의 것을 세우는 데 열중했다. 엉덩이 사이로 들어간 손가락이 슬쩍슬쩍 구멍을 건드리고 있었다. 뜨거운 숨을 토하며 아즈마는 손을 들어 후유시마의 눈을 가렸다. 


"후유……, 신지."

"유카―"

"신지, 상……"


'유카'가 불렀던 대로 후유시마를 불렀다. 후유시마의 눈을 가린 채였다. 당신이 지금 만지고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이며 박고 있는 것은 남자의 뒷구멍이고 눈앞에는 9년 동안 알고 지내던 직장 동료가 흔들리고 있으며 그는 지금 평생 불러본 적 없는 이름으로 당신을 부르면서 사정하고 있다고는 절대 보여주기 싫었다.


뺨이 축축하게 젖었다. 만취 상태의 당신이라 해도 이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다.






▶ 아즈마 하루아키 33세


겨울



계절이 여덟 번 순환하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보더에 쉬쉬하며 퍼진 '아즈마 상이 바이섹슈얼이다'라는 소문은 사실 아즈마가 낸 소문이다. 후유시마가 전투원으로 옮겨 온 다음 해였다.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아즈마를 대하는 후유시마의 태도에는 어떤 미세한 변화도 없었다. 


계절이 다섯 번 순환하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후유시마가 끝끝내 누가 두고 갔는지 알아내지 못한 거액의 축의금은 아즈마의 선물이었다. 축복을 해줄 수가 없다고 대신 돈을 두고 가다니, 고작 스물여덟 살이 하는 생각이 그렇다.


계절이 세 번 순환하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아즈마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후유시마의 품 안에서 아즈마는 그 날 한 잠도 자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에는 자는 척을 했다. 눈을 뜬 후유시마는 숙취를 느낄 겨를도 없이 화들짝 놀라 아즈마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사과했다. 이런 반응을 바라고 아침까지 기다렸던 것이 아니었다. 깊게 숙인 잿빛 뒤통수를 보며 아즈마는 자조를 참을 수 없었다. 결혼식 때도 하지 않았던 기대를 했다. 해묵은 사랑이란 이렇게 해롭다.




계절이 몇 번을 순환하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비밀이 있다. 스트레이트를 좋아한 적이 있다. 담배와 술과 눈물 같은, 독으로 얼룩진 사랑을 한 적이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