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개 글이... 2016년이었군요. 오랜만입니다. (안 잊고 안 버렸습니다.ㅠㅠ)
월트리 연재재개 기념으로 2015년 12월 월드트리거 칵테일바 앤솔로지에 투고했던 단편을 공개합니다. 이제는 아마 구하기 힘든 앤솔로지이기도 하고, 주최자분도 공개를 (이미 예전에) 허락해주셔서...
꽤 초기에 썼던 토마나라라서 그때 당시의 풋풋함(^^;)이 살아있네요.(.....)
데이트를 하자 / 토마나라
토마 이사미의 연인은 별로 재미가 없다. 말수도 적고 표정도 항상 무덤덤하다. 애초에 왜 사귀고 있는지 따지면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동안의 연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성별부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만난 지 벌써 몇 개월째다.
나라사카는 연습벌레지만 토마는 내킬 때나 훈련에 가고, 안 그래도 달랐던 학교는 토마가 졸업하면서 아예 접점이 없어진데다 나라사카는 고3이 돼서 더 바빠졌다. 부대가 달라 마주칠 일도 많지 않은데 그나마도 토마는 가끔 원정까지 간다. 이런 연애하기 척박한 환경에서 둘은 꿋꿋하게 몇 달을 만나온 것이다. 토마에게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애들과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충실하게 적용되어, 방위 임무를 간다 원정에 다녀온다 어쩐다 하는 사이 몇 번인가 다투고 울리고 하다가 헤어지고 말았다. 하긴, 만나려고 사귀는 건데 만나지 못하면 사귈 이유가 없다. 그러니 토마를 차 버렸던 그녀들의 선택이 옳다. 그리고 사실,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토마도 별로 아쉽진 않았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연애를 했다.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런 연애는 해 본 적이 없다. 일주일에 한 번 하면 다행인 데이트와 이모티콘 하나 없는 무뚝뚝한 메일. 나긋나긋하지도 사근사근하지도 살갑거나 애교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모든 연애하기 힘든 조건을 뚫고 만나는 건 처음이다. 하물며 데이트하러 도서관에 온 것도 살다 살다 처음.
「…도서관……?」
「내일 1시에.」
잘못 들은 줄 알고 휴대폰 너머의 나라사카에게 되물었지만, 확인 사살하듯 약속 시간만 재확인 받고 말았다. 도대체 도서관에서 뭘 한다고? 거기서 무슨 얘기나 할 수 있나…? 가끔 토마는 나라사카의 사고회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발끈한다거나 가끔 솔직하지 못하다거나 하는 알기 쉬운 면들 가운데서도 결국 처음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서로 너무 다른 두 사람이라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서관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 고풍스러워 보이는 시립 도서관의 커다란 문 앞에서 토마는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 잘못은 토마에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꺼냈었다. 「같이 가고 싶은 곳 각자 생각해 오기 어때?」라는 말은.
사귄 지 몇 달이나 됐지만, 사실 열아홉 열여덟 말만한 남자애 둘이 사귀면서 여자 친구 사귀는 것 마냥 정성스레 데이트 코스를 정하고 그럴 일이 없었다. 토마는 원래도 그런 일을 귀찮아했고, 나라사카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원래도 자주 하지 못했던 데이트는 그나마도 그저 훈련 끝나고 집까지 같이 걷는 정도, 아니면 라멘이나 같이 먹으러 가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는 게 토마에게는 또 다른 신기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일 신경 써서 뭔가 같이 한 데이트가 고작 영화보기였다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거기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에는 하필 원정이 있었고, 정초에는 타이밍도 좋게 평소보다 트리온병이 많이 출몰해 긴급 호출로 서로 바빴다. 그래도 일단은 사귀는 사이인데, 그것도 토마로서는 이렇게나 꾸준히 만나고 있는 사이인데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한테 이렇게 로맨틱한 부분이 있긴 했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토마는 제안했었다. 공평하게 하나씩 생각해오는 건 어때?
물론 도서관이 튀어나올 줄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아, 토마 씨."
먼저 도착한 나라사카가 입구에서 토마를 맞았다. 회색 체크무늬 목도리에 갈색 더플코트를 입은 모습이 여느 때와 같이 단정했다. 매일 교복과 대원복만 보다가 사복 입은 건 또 오랜만에 봐서, 뭐, 도서관이라도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곳이니까 괜찮나―하고 쉽게 너그러워지는 자신이 우습다.
조용한 도서관에 자리를 잡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황금 같은 연초 주말부터 도서관에 오는 사람은 역시 별로 없는지,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한 쪽 벽면의 창가 옆, 커다란 책상 양 쪽에 마주보고 앉았다. 센터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나라사카는 공부에 쏟는 시간을 요즘 더 늘렸다. 그런 중에도 만나겠다고 응해준 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토마는 볼을 긁적이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나라사카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도서관이라는 선택지가 일리 있긴 했다.
사각사각, 샤프 끝이 노트를 스쳤다. 참고서에 뭔가 적고 있는 나라사카의 갈색 머리카락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색소가 엷은 편인 나라사카는 가끔 이렇게 쏟아지는 빛을 받고 있을 때면 어쩐지 투명해 보인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토마는 무뚝뚝하고 살갑지도 않은 연인이지만 뭐 이 정도로 미인이면 됐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세미인도 길어야 3개월이라던데. 이미 그 기간은 한참 넘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재미없는 녀석을 계속 만나고 싶은 것은.
유행하는 패션이나 새로 나온 시계가 잔뜩 실려 있는 잡지를 휙휙 넘기다가 문득 앞을 보면 참고서의 어딘가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나라사카가 보였다. 저렇게 해서 대학을 굳이 가야 하나 싶다가도, 빈틈없이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타깃에 집중하는 모습과 닮아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서는 시선만은 누구보다 날카로운 점이 절대로 질리지가 않는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 번 이쪽에 시선을 주지 않고 노트를 보는 나라사카를 토마는 즐겁게 관찰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겨울 햇살이 크게 난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느슨한 온기를 싣고 주말의 평온한 공기가 도서관 안을 채웠다. 토마가 가져온 잡지의 페이지는 한참 동안 넘어가지 않았다. 도서관 데이트는 살다 살다 처음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한 쪽 팔에 얼굴을 기대고 엎드려 토마는 마주앉은 나라사카를 흘깃거렸다.
'자나?'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금 목이 뻐근해 얼굴을 들자 엎드린 토마가 보였다. 한 쪽 얼굴은 이쪽을 향한 채로 눈을 감고 있는 토마를 보고, 나라사카는 깨울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게 낮잠이라지만 여기서 잠들 줄은…. 역시 지루했나 싶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잠든 얼굴을 살폈다. 짙은 눈썹은 평소보다 가지런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감긴 눈꺼풀 밑으로 뻗은 약간 굴곡진 코는 만지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다. 늘 생각하지만, 이렇게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아무것도 맘대로 해 주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결국 토마는 다정했다.
「왜 도서관 같은 데를 일부러 가는 건데?!」
「조용한 데서 책도 읽고 좋잖아요.」
「좋다고…?」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티를 있는대로 냈으면서, 결국에는 1시 정각에 늦지도 않고 와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사카는 조금 이기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간만에 만나는데다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곳에 가자고 했는데, 괜히 도서관에 와서 망쳐버린 기분이라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나라사카에게 데이트란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사실 그 장소가 도서관이든 라멘집이든 본부에서 집까지 오는 길거리든 별로 상관없었다.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오라는 말에 왠지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고집을 부렸다. 그 짧은 말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토마도 나라사카와 같다는 것, 같이 뭔가 하고 싶었다는 것.
"…잘생겼지."
반짝, 토마가 눈을 뜨고 놀리듯 말했다. 선잠이 들었던 건지 금세 깨서 시선을 느꼈던 모양이다. 여전히 반쯤 엎드린 자세로 토마의 시선이 똑바로 나라사카 쪽을 향했다. 장난기를 띈 눈동자는 그럼에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그렇게 언뜻 스치는, 잠시 보이는 눈동자의 짙은 부분은 늘 나라사카의 정 가운데를 찔렀다. 읽히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게 만들었다.
"토마 씨, 침 흘리고 자던데요."
"우와, 나라사카 이제 농담도 할 줄 아네?"
토마가 숨을 죽여 웃었다. 조금씩 하강하는 태양이 한낮보다 짙은 색으로 나라사카를 비추고 있었다. 햇살을 받는 나라사카는 그 갈색 머리카락이나 흰 피부가 반짝거린다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있다. 표정을 감추고 있는 나라사카의 귀가, 채도를 더하며 저물어가는 햇빛 아래 발긋해져 있었다. 잔뜩 놀리고 싶은 것을 기특하게도 참고 토마는 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서관 같은 데 이렇게 오래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저녁 뭐 먹지?"
"토마 씨가 기다려 줬으니까 토마 씨 먹고 싶은 걸로."
"그럼 나라사카를."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아까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던 고풍스러운 도서관 정문을 둘이서 빠져나왔다. 겨울 해는 빨리 진다. 따뜻한 색으로 달아오른 노을이 눈이 쌓인 거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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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한 표정의 토마는 나라사카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름대로는 신경을 쓴다고 오늘은 라멘이 아닌 전골을 먹었다. 대장에게 전수받은 방법이라며 신나서 채소며 고기며 버섯을 넣는 토마를 보며 나라사카는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별로 변하지가 않는다. 여유로운 건지 자유로운 건지 단순히 장난이 치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얄미운 점이 사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은 아마도 입이 찢어져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지만.
그런 토마가 생각한 '같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라사카는 토마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발길을 옮겼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하늘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달이 보이고 있었다. 겨울에는 해가 정말 짧아져서, 어두워지고 나면 갈 곳이라고 해봤자 한정되어있을 터였다.
지금 데려가는 곳을 전에 사귀었던 여자들하고도 가 봤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세히는 몰라도 토마가 만났던 여자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을 맞추고 몸을 탐하던 손길은 절대 처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부하기는커녕 나라사카도 손을 뻗어 토마를 만졌다. 그녀들을 (혹시 '그'도 섞여있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빨리 따라잡고 싶어서.
이런 질척거리는 낯선 감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말은 항상 더 무뚝뚝하게 나온다. 하지만 잡힌 손을 나라사카 쪽에서 먼저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내심 알아주었으면 했다. 장갑을 가져와놓고 도서관에서 나올 때는 슬쩍 가방 속에 넣어 버렸다는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붙잡힌 손이 따뜻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 속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끌려가도, 이걸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데이트란 그저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길거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걸어가는 길이 조금 더 길었어도 좋았다.
"으음― 분명히 여기인데?"
어두운 길 한복판에서 토마가 말했다. 텅 빈 공터로 보이는 장소에는 허전한 바람만 불 뿐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무언가 설치되어 있었던 듯 철골 구조물이나 전선 같은 아직 다 치워지지 않은 흔적만 두 사람을 반겼다.
"사람도 없네…. 토마 씨, 여기 어딘데요?"
어, 오늘까지 아니었나? 중얼거리며 토마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라사카의 눈에 <미카도 화이트 일루미네이션>이라고 쓰인, 아직 치워지지 않은 안내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계속 네이버의 공격을 받는 시민들에게 연말연시의 설렘을 되살려 드리겠다는 취지로 시 차원에서 화려한 이벤트를 한다고 하던 뉴스를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쓸데없는 데 돈 낭비하지 말고 무너진 건물들 재건축이나 빨리 하라고 불평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학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화제가 돼서, 찍은 사진을 서로 돌려보던 장면도 기억난다.
"앗, 어제까지였잖아! 젠장, 뭐 이런 거 찾아본 적이 있어야 알지."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한 토마가 억울하다는 듯 혀를 찼다.
"확인 안 했던 거야, 토마 씨?"
"잘 모른다고, 이런 거. 여태까지는 다 여자애들이 먼저…,"
"호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급히 끊은 토마를, 더 말해보라는 듯 나라사카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열아홉이나 됐고, 키도 크고 멀끔하며 성격도 괜찮고 심지어 보더의 정예 대원이기까지 하다. 나라사카 전에 사귄 애인이 없었다고는 거짓말로라도 할 수 없다. 아즈마 씨의 제자로 어릴 때부터 알아왔으니 그건 나라사카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다. 하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지난 연애 이야기를 하는 건 실례다. 자신의 말실수에 당황해 토마는 지레 헛기침을 했다.
"뭐, 뭐, 됐잖아 그런 거. 나라사카 너도 사귄 적 있을 거 아냐."
사실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토마의 연애 사정이야 딱히 숨긴 적도 없고 나라사카가 모른다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나라사카의 연애 사정은 그 반대였다. 누굴 만난다던 소문도 하나 없었던 데다 도대체 훈련에 공부에 바쁜 녀석이 누굴 사귈 시간이나 있었을까 싶다가도, 저 정도 얼굴에 머리도 좋고 뛰어난데 그동안 여자 친구 한 명 없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걸 대놓고 물어보기는 좀 그래서 한 번도 물은 적은 없다. 그래서 말을 돌리는 척 슬쩍 찔러봤건만.
"뭐……."
속 터지는 대답만 돌아왔다.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심지어는 이제 전 애인이 여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건만 답답한 연인은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거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었는데. 낯설고 이상한 기분인데다 나라사카는 말이 없고 바람은 차고 계획했던 '로맨틱한 일루미네이션 보기'는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토마 이사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단어만이 남았다. '젠장.'
"토마 씨,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심지어 눈까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풀나풀 흰 눈이 떨어져 옷 위에 닿아 금세 녹아내렸다. 일루미네이션이 있었다면 퍽이나 어울리는 광경이었을 텐데, 지금은 억울한 기분만 가중시킨다. 토마는 한숨을 쉬었다.
역까지 걷는 길, 눈발은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떨어지던 것이 이제 펑펑 쏟아진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쌓이고 있었다. 이런 함박눈이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둘 다 우산이 없어 머리와 어깨 위에 눈을 싣고 걸었다. 시선을 돌리면 조금 아래에 온통 눈에 젖은 나라사카가 보였다. 가는 머리카락이 젖어서 가닥가닥 뭉쳐 있다. 점퍼 주머니 속에서 잡고 있던 나라사카의 손을 토마는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사람이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일루미네이션은 왜 보러 가자고 해가지고. 여기에서 감기까지 걸리게 하면 정말 최악이겠지.
"나라사카, 일단 우리 집에 가는 게 낫겠어."
"응? 아니, 그럴 것 까지는…."
"지금 완전 젖었다고, 너. 여기선 우리 집이 가깝잖아."
토마의 말에 나라사카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푹 젖어있다. 녹아내린 눈이 물이 되어 뺨을 축축하게 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회색 목도리도 눈에 젖어 색이 진해졌다. 나라사카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토마가 너 또 감기 걸린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감기에 걸려 기껏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못 지켰던 기억도 나서, 더 이상 우기지 않고 나라사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사카가 젖은 만큼 토마도 어깨며 머리카락 위에 눈이 쌓였다. 가까운 데서 먼저 몸을 녹이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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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의 집이 처음은 아니다. 토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몇 번인가 함께 집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뭔가 해 먹기도 하고 침대에서 뒹굴 거리기도 한 후, 밤이 늦기 전 나라사카는 꼬박꼬박 귀가했다. 그래서 토마의 집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 시간에 온 것은 처음이다. 블라인드 틈 사이로 보이는 창밖이 새까맣다. 토마가 타 준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넘기면 목 안쪽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나라사카가 머리카락을 닦고 접어둔 수건을 밀어내고 토마가 옆에 와 앉았다. 젖은 목도리와 코트가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집에 들어왔을 때가 이미 늦어서인지 꽤 시간이 늦어져 버렸다. 걸어놓은 목도리가 얼마나 말랐는지 만져보는 나라사카를 보다가 토마도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외박은커녕, 나라사카와는 이 시각까지 둘이 있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도서관 데이트도 처음, 어딜 가겠다고 장소며 이벤트를 알아본 것도 처음― 그리고 조금 더 오래 있어주었으면 하는, 이런 기분도 처음. …데이트가 망해서 그런가. 이대로 나라사카가 곧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조바심이 들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지 그래."
"자고…?"
"밖에 눈도 계속 오고."
물론 집에 우산이 있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잠시 말이 없던 나라사카가 그래도 못 갈 정도도 아닌데 굳이 외박은…하고 눈치 밥 말아먹은 소리를 한다. 리포트는 혼자 힘으로 하라는 꽉 막힌 소리를 하던 작년과 변한 게 없다. 아, 정말 이런 재미없는 녀석이 뭐가 좋다고 보내기가 아쉬운 건지 모르겠다.
"네가 무슨 신데렐라냐, 꼬박꼬박 일찍 들어갔으면 이럴 때는 외박해도 괜찮다고. 친구네 집에서 잔 적 없어?"
"있지만…."
"애초에 너 평소에 너무 일찍 들어가잖아. 노느라 늦게 들어간 적도 없어?"
"그건 없는데요."
"데이트는?"
"없… 아니, 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있다고 하려 했지만 무심코 정직하게 없, 까지 뱉어버리고 수습하려다 실패한 나라사카의 귀가 민망함에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저기 나라사카, 거짓말을 하려면 좀 잘 하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여자 친구라면 있었다. 아까 누구를 사귄 적은 있냐는 물음에 대답이 애매했던 것은 정말 애매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고백을 받아 사귀었지만 그렇게 좋지도 설레지도 않았고, 키스마저 감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늦게까지 데이트를 한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잘해준다고 했던 행동들마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매너였을 뿐.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별 것 아닌 제안에 기뻐하고 고집부리고 후회하고 자존심을 세우는 그 모든 감정의 파고가 나라사카는 낯설다. 해 본 적 없는 거짓말을 하려니 사단이 난다.
안 한 걸 했다고 말도 못하는 고지식한 연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토마는 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토마 이사미의 연인은 별로 재미가 없다. 말수도 적고 표정도 항상 무덤덤하다. 그런데 때때로 지나치게 귀여워서,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다. 그 모든 척박한 조건을 뚫고 이렇게 오랫동안, 난생 처음으로.
"나라사카, 밖에 춥다고?"
묵묵부답인 나라사카의 뺨을 양 손으로 감싸고 토마는 눈을 맞췄다.
"자고 가. 초코 과자도 있어."
"……어린애도 아니고."
나라사카는 귀가 붉어져서도 토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맑은 녹색 눈동자에 토마의 얼굴이 비쳤다. 저 만사 여유로운 얼굴에 또 지는 것이 분하다. 어린애도 아니고 과자로 꾄다고 넘어갈까.
"진짜야, 너 때문에 사놨다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넘어가는 건 또 어디의 누구인가. 나라사카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오늘 도서관 같은 델 데려가서 데이트를 망쳤으니까. 미안하니까 한 번 넘어가줄까… 과연 누구를 위한 건지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밖에는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날 나라사카는 철이 든 후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서투른 거짓말쟁이가 ‘공부하다가’ 라는 말을 중간에 굳이 끼워 넣었던 것도 그 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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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은 토마와 나라사카 오비츠로이드를 만들어 인형놀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형 사진은 트위터(@ heidi_wt)에 올리고 있어요. 자주 올리지는 못하지만...
월트리도 연재재개했으니 앞으로는 감상이나 사담이나 망상도 종종 트윗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월트리가... 연재재개... 연재재개라니...!!ㅠㅠ